소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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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삼국간 잦은 전란으로 사람들은 대부분 도성이나 읍성에 거주하는 것이 보통 이었으며 이러한 성(城)은 대개 구릉지에 축조되었고, 도성의 건축술이 발달되어 왕궁, 관청, 도성등 대형건축물이 축조되고 일반인들의 민가는 서로 인접하여 짓게 되어 화재발생시 연소가 용이하여 대형화재로 발전, 화재가 사회적 재앙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기록

  • 신라시대 미추왕(이사금) 원년(서기 262년), 금성 서문에 화재발생 민가 1백 여채 연소
  • 진평왕 18년(서기 596년), 영흥사에 불이나 왕이 친히 이재민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는 기록
    (민가가 밀접한 도성 내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화재를 사회적 재앙으로 인식하여
    국가에서 구휼 대책 마련)

이 시대에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도성에서는 대개 군사들과 성민들이 합세하여 불을 진화하였고 지방에서는 부족적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부락 단위로 소방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

삼국시대는 신라에 의해 통일이 되고 전쟁은 사라졌으며 평화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산업이 발달하고 인구증가가 가속화되었으며
도성내에는 시가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도시가 번창하고 시가지의 민가가 밀집함에 따라 화재가 자주 발생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한 주민들의 방화의식도 싹텄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기록

헌강왕 6년(서기 880년) 9월에 왕이 좌우 군신과 월상루에 올라서 사방을 관망하였는데 가옥이 줄지어 늘어섰고 가악이
그치지 아니하므로 왕이 가신에게 말하기를 “내 듣건데 작금에 백성이 집을 기와로 덮고 밥을 지을 때 숯을 쓰는데
사실이 그런가” 라고 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사회가 안정되고 경주가 번창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화재예방 측면에서 볼 때 민가의 지붕을 초옥(짚)으로 하지 않고 기와로 하였고 나무를 때지 않고 숯을 써서 밥을 지었다 함은 백성들의 화재에 대한 방화의식에서 기인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고려 시대

고려시대에 와서 국가차원에서 소방에 관한 제도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정부 조직처럼 화재를 담당하는 전문조직은 없었으나 『금화제도』라는 명칭으로 화기를 단속하고 예방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보다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인구가
증가되고 대형 건물이 들어선 데다가 병란이 잦은데 그 원인이 있었다.

더욱이 도읍지였던 개경은 지역이 협소하여 건물들이 밀집하였고, 민가의 경우 초옥이 대부분 이어서 한번 화재가 발생하게 되면 민가
및 상가로 확대되어 수 백동씩 연소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이 시대에서는 왜구의 방화 약탈이 심하여 각 궁전과 창고의 대형화재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 조선왕조시대에는 한성부를 비롯한 평양부·함흥부 등 도시들이 밀접·복잡해지고 수공업의 급속한 성장과 상업도시로 발달함에 따라서 전국 각지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하였으며, 병란 및 민란 등으로 궁궐문화재에도 극심하였다.

따라서 이 시대부터 소방 고유조직이 탄생되었는데 특히 세종대왕때에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금화군을 편성하여 화재를 방비하는 등
새로운 소방제도가 가장 많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연산군 이후부터 철종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화재가 많이 발생하였음에도 계속되는 당쟁과 침략 전쟁에 시달렸던 때문인지
소방제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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